이 책은 요한 계시록 강해서이다. 요한 계시록은 알려진 바와 같이 어려운 책이다. 칼빈도 요한 계시록에 대한 주석은 쓰지 않았다. 아더 핑크와 같은 탁월한 성경 강해가도 요한 계시록을 해석하는 것에 있어서는,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세대주의의 견해를 취하고 있어 개혁주의 내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현실들은 요한 계시록에 대한 균형 잡힌 성경 강해서와 주석의 필요성을 증가시키고 있다. 요한 계시록에 관한 탁월한 주석으로는 윌리엄 핸드릭슨의 요한 계시록 주석을 들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대한 예수로 장로회 합동 측에서는 박형룡 교수의 영향으로 전 천년 설이 요한 계시록의 천년 설에 대한 바른 성경적 견해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총신 내의 교수들 사이에서도 종말론에 대한 견해를 나누어지고 있고, 어느 한 견해만이 옳다라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의 저자인 헤르만 휙세마 교수는 많은 저자들이 전천년설, 세대주의, 그리고 다른 견해들로 요한 계시록을 해석하고 있는 것에 반하여, 견고한 개혁 신학을 드러내고, 요한 계시록 자체를 해석하는 데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저자(1886-1965)는 그의 개신교 개혁 교회의 큰 회중의 목회자로서뿐만 아니라, 또한 신학교의 교수이자, ‘The Standard Bearer’ 잡지의 편집장으로서, 또 인기 있는 강사이자 많은 영향력 있는 개혁 신학 책들의 저자로서 큰 영향력을 주었다.
이 책의 53장�� 시리즈 설교 내용들을 통하여 휙세마는 ‘빛나고, 단순하지만 철저한 강해와 따뜻하고 친근감 가는 방식으로 전달되어 많은 회중들을 매주 주의를 끌게 만들었던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사실상 마틴 로이드 죤스와 챨스 스펄젼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회중들에게서 입증된 실천적인 성경 강해야말로 독자들에게도 많은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 탁월한 강해서는 신약 성경의 아주 상징적인 책의 어려운 부분들을 보통의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휙세마는 마지막 날들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도하는 것에 강조를 두고 있다. 요한 계시록이 어떻게 교회에 위로를 가져다 주는 지를 저자는 입증하고 있다.
1969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지만, 아직도 이 시대를 초월한 가치 있는 책을 많은 사람들은 필요로 하고 있다. 이 책은 호머 휙세마의 의해 부분적으로 개정되고 편집되었다.
저자는 그의 목회 사역 기간 동안 두 번 요한 계시록을 완전히 설교하였다. 첫 번째 시리즈 설교들은 세계 제 1차 대전 직후에 행해졌다. 두 번째 시리즈 설교들은 세계 제 2차 대전 시기에 속해 있다.
게다가 한번 이상 저자는 큰 규모의 요한 계시록 부분 혹은 전체의 세부적인 성인 성경 공부 모임을 이끌었다. 저자의 요한 계시록 설교들은 저자가 오랫동안 편집인으로 섬겼던 ‘더 스탠다드 베어러’ 잡지에 처음으로 소개되었었다.
각각의 설교들은 길지 않으며 필요한 단어들을 잘 설명해 주고 있으며 소 제목들이 붙어 있어서 조직적으로 각 장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다.
우리는 성경 66권의 모든 부분이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선호하는 성경의 몇몇 책이나 부분들을 강조하거나 따로 취해서 읽거나 가르치는 것은 피해져야 한다.
로이드 죤스도 그러한 이유로 구약을 제외하고 신약 성경만을 출판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으며, 성경의 몇몇 선호 구절들을 문맥을 무시하고 취하여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칼빈이 연속 강해를 한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고 평가 된다. 또한 청교도들도 성경을 연속하여 강해해 나가는 것을 선호하여 성경에 대한 탁월한 강해서 들과 주석들을 남겨 놓았는데,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우리는 성경 자체를 바르게 강해하는 것의 중요성과 그것이 바로 성도들을 세우고 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에는 구약이나 요한 계시록과 같은 부분들은 어렵다는 이유로 인하여, 또 잘못 해석되는 경우들이 허다한데, 이러한 건전한 강해서를 통하여 성경을 바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저자의 강해서 에서 돋보이는 것은 저자 자신에 대한 이야기나 재미를 위한 예화나 지나치게 학구적이거나 다른 저자들에 대한 인용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교리적이고 성경 자체를 깊이 있고 바르게 해석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그것을 성도들에게 적용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강해 방식을 통하여 우리는 오늘날 바른 성경 강해의 필요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달아야 한다.
많은 설교자들이 본문을 도용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강단에서 쏟아 놓거나, 정치를 하거나,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을 오늘날 우리는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반면에 성경 자체에 충실한 교리적이고 실천적이고 실제적이며 양심에 도달하는 설교를 듣기가 무척 힘들어졌다. 다시 말해서 말씀의 해석자이어야 할 설교자들이 자신들의 의무를 게을리하고 태만하게 행함으로 인하여 강단이 하나의 연단으로 전락한 현실의 열매를 오늘날의 교회는 거두고 있다.
칼빈이나 청교도들의 설교들을 오늘날 우리가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그들은 마치 신학 논문이나 에세이를 쓰는 것과 같이 조직적이고 깊은 신학적인 강해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강단의 질은 그것을 위해 들인 연구나 시간에 비례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선진들이 남겨 놓은 영적 유산에 대한 탐구 없이 능력 있는 목회 사역을 기대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이 책의 말미에 제시되어 있는 성경 인용 색인을 보며 우리는 저자가 성경에 대하여 정통해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 차릴 수 있다. 탁월한 성경 해석자들은 언제나 한 책의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들의 설교들과 책들에서도 우리는 지나치리만치 반복되는 성경 근거 구절들을 보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그들의 모든 설교의 최종적인 권위를 성경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는 성경의 권위 보다는 특정한 설교자나 신학자의 견해나 신학이 더 권위 있게 보여진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의 영감이나 권위를 부정하는 데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옛 신앙의 선진들은 언제나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에서 가는 데에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추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것에 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무지와 교만의 소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한편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도 비겁하고 책망 받을 일임은 명백하다. 그러한 면에서 이러한 책들의 출판과 보존은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참된 진리는 언제나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계시록을 공부하고 바로 이해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을 쓰시며, 성경을 사랑하고 열심히 탐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는 사람임을 교회사와 성경이 말씀해주고 있다.